1970년대 소설
1970년대는 우리 역사에서 진보와 발전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거론된 시대이다. 사회적으로 전쟁의 상처가 많이 아물고, 경제적으로는 중진국으로의 진입과 산업화의 가속력이 있었다. 삶의 여건도 많이 변화하여, 농촌 사회가 해체되고 농민들이 산업 노동자로 유입되었으며, 이에 따른 인구의 도시 집중으로 말미암아 도시 빈민이 생성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조건은 문학에도 영향력을 행사해 우리 소설에 전례 없던 풍성한 자료를 제공했다.
60년대가 관념적 인식과 상징에 의존했다면, 70년대는 현실적 삶에 초점을 맞추는 양상을 보여 주었다. 그 대표적 형태가 농촌 공동체의 해체와 근대화에 대한 비판인데, 이문구의 '관촌 수필' , '해벽' , '우리 동네' 연작이 선구적 역할을 하고 있다. 송기숙의 '자랏골의 비가' , '암태도' 는 농민의 저항 의식을 담고 있으며, 농촌 현실을 증언한 김춘복의 '쌈짓골' , 어촌을 배경으로 한 천승세의 '낙월도' , '신궁' , 한승원의 '그 바다 끓며 넘치며' 등을 이 계열에 포함시킬 수 있다.
노동 현실의 소설화 양상도 두드러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 , '객지' , 윤홍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 '직선과 곡선' , '날개 또는 수갑' , '창백한 중년' , 연작 형태의 장편 소설인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이 이러한 유형에 들어 있다.
그러나 70년대는 정치적 삶과 경제적 삶의 불균형 상태를 낳음으로써 불완전성을 내포한 시대였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 소설사에 병리적 상징으로 나타나서 불완전한 인물과 병실 공간의 등장이 두드러진다. 이청준의 '퇴원' , '병신과 머저리' , '황홀한 실종' , 박태순의 '실금' , 정종명의 '이명' , 최인호의 '견습 환자' , 정연희의 '어릿광대 의 치통' ,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2' , 안장환의 '동통' , 이동하의 '파편' 김구영의 '어디가 아프십니까' , 한승원의 '벌받는 사람들' , 오탁번의 '절망과 기교' , 문순태의 '개안 수술' , 현기영의 '순이 삼촌' , 임철우의 '직선과 독가스' 등의 작품들이 대표작들이다.
산업화와 인구 도시 집중은 우리 소설사에서 도시형 소설의 다량 생산을 낳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대표적 예가 박완서의 '도시의 흉년' , '서울 사람들' , 이동하의 '도시의 늪' , '장난감 도시' , 신상웅의 '도시의 자전' , 황석영의 '돼지 꿈' , 최인호의 '타인의 방' , 서영은의 '유리의 방' ,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 시대' , 최일남의 '서울 사람 들' , 전상국의 '고려장' , 이문열의 '달팽이의 꿈' 등이 대표작이며, 이러한 양상은 80 년대 양귀자, 최수철, 박영한 등의 소설로 이어지게 된다.
70년대 소설의 또 하나의 특징은 역사 소설이 큰 호응을 얻었다는 점이다. 이는 4? 19로 비롯된 역사 의식의 성장과 급격한 시대적 변동에 따른 역사적 단절감의 회복 욕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 작품들로, 안수길의 '북간도' , 박경리의 '토지' , 유주현의 '조선 총독부' , 서기원의 '혁명' , 유현종의 '들불' , '연개소문' , '임꺽정' , 황석영의 '장길산' , 김성한의 '이성계' , '임진왜란' , 김주영의 '객주' , 이병주의 '지리산' 등이 있으며, 특기할만한 점은 위인 중심의 전기적 역사 소설에서 탈피하여 우리 역사의 숨겨진 부분과 이름 없는 민중들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두드러졌다는 점일 것이다.
70년대 소설에는 제3세계적 시각이 폭넓게 깔려 있다. 여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가한 것이 '월남 참전' 이었다. 이로부터 자유와 민주의 문제에서 자주의 문제로 확산되어 반제국주의 의식이 형상화되기 시적했는데, 그 대표적 작품들은 신상웅의 '분노의 일기' , 조해일의 '아메리카' , 이문구의 '해벽' , 천승세의 '황구의 비명' 들과 직접 월 남전을 다룬 작품으로 황석영의 '탑' , '낙타 누깔' , '몰개월의 새' , 박영환의 '머나먼 쏭바강' , '인간의 새벽' 등이 있다. 이러한 흐름은 80년대에 안정효의 '하얀 전쟁' 을 비롯한 일련의 작품들로 이어지게 된다.
70년대는 이상과 같은 큰 흐름 외에도 다양한 작가들이 나름대로의 개성적 문학관을 펼치면서 우리 소설사를 장식하고 있다. 자아와 세계의 불화에 대한 낭만적 인식을 기저로 하고 있는 최인호의 '무서운 복수' , '술꾼' , '예행 연습' , '별들의 고향' , '바보들의 행진' , 한수산의 '해빙기의 아침' , '밤의 찬가' , 오정희의 '직녀' , '불의 강' , '꿈꾸는 새' , 서영은의 '야만인' , '틈입자' , '사막을 건너는 법' 등의 소설이 그 예들이다. 그 밖에도 최일남의 '둘째 사위' , '디오게네스의 변절' , 최상규의 '대합실' , 정을병의 '피임 사회' , 강용준의 '탈주자들' , 김용성의 '리빠똥 장군' , 홍성원의 '무사와 악사' , '흔들리는 땅' , 김채원의 '먼 바다' , 유채용의 '누님의 초상'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동시에 70년대 후반 소설사에 새로운 작가들로 등장한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 '들소' , 김성동의 '만다라' , 김원구의 '무기질 청년' 등도 주목해야 할 작품들이다.
2. 1980년대 소설
1980년대는 70년대에 이미 태동하기 시작한 민중 문학의 기운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문단의 큰 세력을 형성한 시대이다. 1980년대를 말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이 80년 5월에 있었던 광주 민중 항쟁이다. 70년대가 유신이라는 폭압과 독재 속에서 유지된 시대였고, 그 억압성은 80년 5월의 광주 항쟁을 낳게 되었으며, 광주 민중 항쟁은 새로운 시대로의 진입을 예고하였기 때문이다. 이 비극적 체험은 이후의 문학적 상상력이나 정신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여, 80년대의 문학은 광주를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긴 파장을 드리웠다.
한편, 80년대는 70년대부터 가속화되기 시작한 산업화의 흐름이 더욱 급격하게 되고 이에 따라 노동자를 양산하면서 그들의 생존권 투쟁은 전국적 규모로 이어졌다. 어쨌든, 80년대는 유례없이 어두운 갈등의 시대였으며, 이에 대한 반작용 및 돌파구로 진보적인 역사관이 강한 목청을 돋운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먼저, 80년대를 휩쓴 진보(進步)의 열기에서 비켜선 자리에서 문학을 했던 일군의 작가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작가가 이문열이다. 그는 '금시조' 를 통하여 동양 예술에 관심을 갖더니 '칼레파 타 칼라' 를 통해서는 그리스 도시 국가를 배경으로 우리의 역사에 일종의 의문을 제기했다. 이문열은 훗일 '시대와의 불화' 란 산문집에서 자신이 왜 '어두운 열정에의 경사(傾斜)를 거부했는지' 를 해명하고 있다. 그와 더불어 젊은이들의 삶을 그린 유후명의 '돈후의 사랑' , 샤머니즘 혹은 원시적인 신화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보여 준 한승원의 '불의 딸' , 교육 현장을 다룬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 , 박양호의 '지방 대학 교수' ,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우리 삶의 정신적, 물리적 폭력의 양상을 그린 이동하의 '폭력 연구' 등이 대표적이다. 소설적 기법의 새로움을 추구한 작가군으로 80년대에 모습을 드러낸 이인성, 최수철, 서정인 등도 이러한 현상에 동참한 작가들이다. 이인성은 '낯선 시간 속으로' , '한없이 낮은 숨결로' 등의 작품을 통해 기존의 소설 기법에 대한 과감한 해체를 추구하고 있다. 최수철은 사회 구조와 개인의 삶의 양상을 독특한 문제로 표현하고 있다. '고래 뱃속에서' 가 그의 대표적 작품이다. 서정인은 '달궁' 시리즈를 통해 기법 실험의 한 극단을 보여 주었다.
그 밖에 냉소주의적인 입장에서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는 고원정의 '거인의 잠' 이나, 역사 소설의 기법으로 우리 현실을 우회적으로 그려 낸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 등도 소재의 확대를 가져온 부류들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광주 체험의 충격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서 우선적으로 대두한 것이 광주 항쟁에 대한 그릇된 관점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유택의 '먼 길' 은 군에 대한 불신과 공포감을 그리고 있다. 임철우의 '봄날' , '직선과 독가스' , 윤정모의 '밤길' , 몬순태의 '일어서는 땅' , 정도상의 '십오방 이야기' , 최윤의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 홍희담의 '깃발' 등의 작품은 그러한 유에 속하는 작품들이라 하겠다. 특히, 홍희담의 '깃발' 은 노동자의 시각에서 광주 항쟁을 바라봄으로써 그 동안 지식인의 시각에 한정된 광주 항쟁의 역사적 의미에 진보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세 번째로는 이러한 광주에 대한 의식과 더불어 수많은 노동자의 출현으로 빚어진 진보적인 흐름들이다. 시대적 피해자라는 인식으로부터 생성된 노동자의 주체적인 자각은 80년대 소설 문학의 가장 커다란 성과이면서 두드러진 특징으로 드러난다. 이는 70년대의 조세희나 황석영이 보여 주었던 지식인 시각의 진보 의식과는 크게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김일남의 '파도' , 정도상의 '새벽 기차' , 유순하의 '생성' , 방현석의 '새벽 출정' 등인데, 이러한 작품들의 기본 골격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과 자본가의 탄압에 대한 노동자의 집단적인 행동, 그로부터의 승리 또는 낙관적인 전망의 제시라는 틀을 지니고 있다.
네 번째로는 분단 문학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몇 가지로 그 성격이 분리되는데, 그 하나는 전세대에서 벌어졌던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오늘날의 우리의 삶과는 어떻게 연관되는가를 묻는 작품들로, 윤정모의 '님' , 이창동의 '소지' 가 그 대표적 작품이고, 두 번째는 이데올로기 자체의 허구성과 이로 인한 비극을 다룬 작품으로 이문열의 '영웅 시대' 가 이에 해당한다. 세 번째로는 해방 직후의 삶을 통해 우리 삶의 비극의 원천을 형상화한 것으로 김원일의 '겨울 골짜기' 와 조정래의 '태백 산맥' 이 있다. 이 밖에도 분단의 실상과 이의 타개 노력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작품으로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 , 이상문의 '황색인' 등이 있다.
이상에서 언급한 것 이외에도, 이웃들의 삶을 통해 우리 사회의 여러 모순과 이로 인한 삶의 파괴를 그린 작품으로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 , 박영한의 '왕릉 일가' , '우묵배미의 사랑' 등이 있으며, 사회 역사적 환경을 배경으로 성장 소설의 한 패턴을 마련하고 있는 김용성의 '도둑 일기' , 인물의 심리 분석을 통하여 개인적 사회적 갈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김향숙의 '겨울의 빛' , 소외된 삶을 다루고 있는 윤후명의 '원숭이는 없다' , 역사와 현실에서 파생하는 문제를 유려한 문체로 드러낸 최일남의 '그때 말이 있었네' , 한여인의 회상을 통해 잔잔한 감동의 세계를 그린 김채원의 '겨울의 환' 등의 작품들도 80년대를 빛내고 있다.
3. 1990년대 소설
1990년대 한국 소설의 영상화 연구
― 이미지와 가상현실
조 정 래*<!-- * 서경대 국문학과 교수 -->1)
1. 1990년대 작가들의 빠른 변신
자본주의 산업 사회 이후 소설 장르는 문학의 중심장르로 부각하여 가장 비중 있는 읽을거리의 위치를 차지해왔다. 그만큼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해명하고 나아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소설이 큰 기여를 해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소설이 이처럼 강력한 문화 수단으로 부상한 데에는, 근대 사회 이후 개개인이 자기의 삶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에 맞는 이야기를 필요로 하였지만, 근대 사회가 특히 양적으로 이야기를 생산해낸 것은 삶이 개별화되면서 동시에 다양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그 다양하고 개체화된 삶들에게 구체적인 자기 확인의 길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생활이 복잡해지고 개인의 욕망과 사회적 틀의 충돌이 문제가 될수록 이야기는 복잡해지고 구체화되어야 했다. 소설 장르가 중요한 읽을거리로 부상한 데에는 이처럼 이야기의 기능이 강조되었음을 주 요인으로 들어야 한다. 개인의 주체적 삶을 중요시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삶에 대한 여러 상황과 조건, 혹은 관계를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를 가장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양식이 바로 소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소설의 이러한 지배적 위치는 크게 흔들리고 있다. 소설의 기능이 크게 위축될 것이라는 예측은 이미 여러 각도에서 나오고 있고, 실제로 소설을 읽는 독자의 층이 늘어나지 않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는 이렇다할 밀리언 셀러가 나오지도 않았다.
특히 영화나 만화 양식이 번창하면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서사문화의 주도권 싸움이 눈에 보이지 않게 진행되어 왔다. 이러한 현상이 왜 일어나는가, 혹은 이 현상이 일시적인 것인가 하는 문제들은 더 논의를 진행해야 할 과제이다. 당장은 이러한 현상이 소설의 변화, 또는 변혁이나 변이를 어느 정도 유도할 것은 틀림없다는 예측에서 더 나아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소설 장르는 어떤 형태로 달라질 것인가? 새로운 세기의 사회 성격이 어떻게 변화할 지 모르기 때문에 소설 장르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대한 전망이나 예측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미래를 내다보려면 현재를 정확하게 진단해야 한다. 현재가 원인이 되고 그 원인들이 축적되어 미래의 어떤 결과를 낳는 법이다. 그렇다면 소설의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앞으로 중심 세력을 형성하여 소설 문단을 이끌어갈 젊은 작가들의 경향을 분석해보는 것이다. 이른바 신세대 작가라고 하는 이들이 바로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신세대 작가들이 앞으로 새로운 세기가 펼쳐지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할 작가들이라면, 그들이 어떠한 경향을 지니고 있고 그 경향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탐구해 봄으로써 우리 소설문학의 단기적인 변화는 어느 정도 점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문학사에서 신세대 작가라는 용어를 어떤 시대적 징후로 삼아 논의한 적이 세 번 있다. 신세대라는 용어를 말 그대로 새로운 세대라는 보편적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문학사적 의미를 지니기 어렵다. 늘 세대를 바꾸면서 역사는 나아가기 마련이므로, 신세대라는 것이야 어느 시대에나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용어가 하나의 사회적 관심 담론으로 떠오를 경우에는, 신세대라는 개념이 당연한 역사 진행에 따른 보편적 현상을 뜻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어떤 시대적 특성을 문제삼게 된다. 즉 사회의 변화가 극심하거나 큰 변혁이 있거나 혹은 사회적 위기감이 농후하게 감지되거나 하는 그런 경우이다. 신세대 작가라는 말도 마찬가지로 일정한 의미를 가지는 시대적 징후 속에서 쓰일 때에 비로소 문학사적 의미를 갖는 법이다.
우리 문학사에서 신세대 작가라는 용어가 처음 제기된 것은 1930년대 중반기이고, 두 번째는 1950년대 전쟁 직후이다. 두 경우를 간략하게 비교해 보면 어떤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로 두 번 다 시기적으로 사회적 위기감이나 좌절감을 크게 겪을 때 발생했다. 30년대에는 파시즘이 강화되면서 전쟁 체제가 굳어지는 시점이었고, 50년대에는 말 그대로 전후의 허무감이 암운처럼 사회를 뒤덮었다. 신세대라는 개념이 대두된 것은 사회적 안정성이 흔들릴 시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전쟁 전후에 사회적 위기가 팽창하는 시점에서는 보수적이고 전통적 가치가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 따라서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기존의 가치 체계는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시점이 신세대라는 도전 세력의 존재적 기반을 제공한 것이다.
그 다음, 두 번 다 신세대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작가들은 삶의 현상과 실재론적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30년대의 신세대 작가였던 김동리, 황순원 등이 삶이라는 그 현상 자체에서 서사의 핵을 찾았다면, 이범선, 김성한, 장용학, 선우휘 등 50년대 신세대작가들은 실존적 뿌리에 초점을 두었다. 즉 현상학 혹은 실존주의적 가치관에 기반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로, 그런 만큼, 신세대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문학 체계를 선도하면서 두 경우 다 신세대 작가들은 극우파적 경향을 지녔다. 그리고 그 성향 때문에 이후 문단의 형성에서 주도적 구실을 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신세대라는 이름으로 이데올로기에 편승하면서 문단의 새 조류를 만들어낸 그들은, 이후 일단의 문단적 권력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1990년대에 진입하면서 우리 문학사는 또 다시 신세대 작가에 관한 논의에 마주쳤다. 물론 이들 신세대 작가들과 이전의 신세대 작가들을 같은 성격으로 묶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럴 만한 구체적 근거를 아직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전의 문학사적 현상들에서 보았던 변화를 90년대의 신세대 작가들에게서 다시 마주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조짐마저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첫째, 앞의 두 시기가 그랬듯이 지금 우리는 사회적 위기감과 좌절감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 물론 그 성격이 30년대나 50년대와는 다르다. 지금의 위기감은 세기말적 현상이라는 철학사적 성격을 갖기도 하면서 과학 기술의 무분별한 치솟음에 의한 문명사적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동시에 경제 체제의 급진적 변화와 정보통신사회의 단절감이 파생하는 사회사적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위기감의 원인이 눈에 보이지 않고 그만큼 전망을 확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지금의 위기감과 절망감은 이전 시대보다 더 근원적이고 암담하며 깊다.
따라서 30년대, 50년대와 마찬가지로 신세대 작가들은 존재의 현상에 관심을 갖는데, 그것은 늪과 같은 절망감에 대한 반응의 하나이다. 가장 대표적인 작가로 윤대녕과 신경숙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다 존재의 내부를 들여다보되 현상적으로 본다. 따라서 존재의 내면, 특히 객관적이고 철학적인 혹은 보편적인 내면이 아니라 주체의 자각적 현상으로서 내면을 들여다보고 표현한다. 비록 그 방향은 작가마다 다르지만, 공통되게 다루고 있는 것은 존재 현상이다. 그런데 이들 이후에 나타난, 기준에서 신세대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후배작가들은 더욱 더 현상에 집착하고 실존적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둘째로 이들 신세대 작가들은 비록 진보적 입장을 표방하고 있지만, 그들의 진보성은 우파적 성향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들은 풍성한 경제적 토대에 기반을 두고 삶을 바라보며, 그만큼 산업사회가 배출해 놓은 억압과 소외 현상을 대상으로 삼을 때 현실 비판과 진보적 방향 추구가 가능하다.
셋째, 이전의 신세대 작가 논의 결과를 통해 유추해 볼 때, 이전의 신세대 작가들이 그러했듯이 90년대 신세대 작가들도 다음 세대의 문단에서 주류를 이루게 될 가능성이 크다. 세대 논의 자체가 그러한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다. 지금 신세대 작가들의 공통된 또 하나의 특징은 이들이 빠르게 문단에 흡수되고 자기 자리를 만들고, 자신들의 세계를 펼치는 데에 거침이 없다는 사실이다. 최근에 등단한 작가들이 어느 정도의 문장 수업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문장력에 있어서 그 수준이 고르지 못하다. 그러나 자기 이름을 문단에 알리고 작품을 여기저기 잡지에 올리는 데에 시간이 그다지 걸리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도 빠르고 쉽게 해내는 듯하다.
자기 세계를 문단에서 빠르게 구축함은 그만큼 자기 개체에 대한 집착이 강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기의 세계에 대한 자아 집착이 강한 반면 그에 대한 깊은 성찰과 책임의식은 따르지 못한다. 성찰의 깊이가 책임감의 강도는 속도감에 반비례하는 것인데, 어쨌거나 이들의 창작 속도나 발표지면의 확보는 참으로 빨라서 쉽게 세대적 공유 공간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이른바 신세대 작가들의 작품 경향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그들의 공통된, 그러면서도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는 특성을 찾아낸다면, 앞으로 소설이 어떻게 변신할 것인지 하는 방향을 감지할 수 있으리라 본다. 물론 변화의 모습은 다양한 요소에서 번져갈 수 있다. 기법에서, 혹은 작가의 내면풍경에서 혹은 언어에서, 변화가 시작하고 그에 따라 소설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요소들을 일일이 챙겨볼 다양한 시각을 필자가 채 갖지 못하였으므로, 그 중 한 요소인 소설의 영상문학화 혹은 이미지화를 중심으로 신세대 작가의 특징을 분석함으로써 우리 소설의 변화 방향에 대한 예측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2. 이미지, 수단에서 목적으로
신세대 작가라는 용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하지만, 워낙 작가들의 경향이 빠르게 나타나고, 그 방법적 기반도 다양하므로 신세대 작가라는 용어 하나로 90년대 초기와 후기의 작가를 한 울타리에 묶기는 어렵다. 최근의 신세대 작가들은 90년대 초의 신세대 작가들과 조금씩 다른 성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윤대녕, 신경숙, 박상우, 구효서 등 90년대 초기에 주로 두각을 나타낸 이른바 선배 신세대 작가들은, 기존의 작법에 대한 반감을 갖고 더 세밀하게 존재의 내면에 침투해 가는 문장을 다듬어 내었다. 기본적으로 그들의 미적 감각은 언어에 기반을 둔 것이고 언어를 활용한 서사를 버리지 아니하였다. 물론 이전의 작가에 비하면 인과율을 바탕으로 한 서사성의 전통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으므로, 서사성의 골격을 많이 와해시키기는 하였지만 서사성 자체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이들에게서 배운 후배 신세대 작가들은 이제 그 서사성에 대한 의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서사성 자체의 고유한 골격을 부수려 하고 있다. 그들은 이야기가 본질인 소설을 쓰면서도 서사에 의존하기보다는, 표면적으로는 서사적 언어에 기대면서도 실상은 시각적 이미지를 추구하는 데에 더 치중하고 있다.
이미지란 생각과 느낌을 구체화하기 위한 가상적 영상을 의미한다. 슬프다, 기쁘다, 그립다, 귀엽다 등의 느낌이나 감각 혹은 마음의 작용 등은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는 있지만 그 있음을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한편으로 나를 발견하면서 나와 세계를 소통하기 위함에 있다. 서로 통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세계, 혹은 우리가 알지만 표현의 공유 수단을 갖지 못하여 소통할 수 없는 세계마저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물리적 어려움을 극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로 만들고 소통할 때 우리는 진실을 나눌 수 있다.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가상적인 영상을 만들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게 꾸미고, 그 영상을 매개로 하여 서로의 소통을 일궈내기 위하여 개발한 것이 이미지 기법이다. 즉 이미지란 우리의 행동과 생각, 감정, 욕망에 대하여 시간을 초월한 소통적 대화를 위한 매개 수단이다. 물론 이미지란 언어로서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원시적인 이미지 생산의 수단은 그림이었다. 오늘날 예술의 발달사는 어쩌면 이미지의 구체화를 위한 역사였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것은 이미지야말로 추상과 구상을 결합하는 수단이면서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 수단을 가장 치밀하게 기법화하여 언어로서 영상을 만들어 낸 이들은 시인들이다. 물론 화가들은 훨씬 실상적으로 이미지를 직접 이용한다. 이미지로서 소통을 하는 수단은 매우 빠르다는 강점이 있다. 그러나 이 수단은 현상적이어서 고도의 형이상학이나 성찰을 담아내기에는 그 자체로는 역부족일 뿐만 아니라 성찰의 철학적 전개를 방해할 수도 있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음악이나 미술이 빠르게 감각을 움직이게 하여 느낌을 주는 데에 반해 철학적 기능이 약한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상대적으로 문학은 직접 감각을 이용하는 미술이나 음악과 달리 언어를 매체로 이용하기 때문에 가장 깊은 상상력과 철학적 탐구를 통하여 소통을 구체화할 수 있는 장르이다. 그런데 너무 이미지에 집착하면 그런 언어 매체의 장점을 상실하게 된다. 현대에 와서 갈수록 사회가 복잡해지고 관계도 다중적이 되며 사물을 이해하는 각도도 넓어지게 되었다. 반면에 사물을 주체가 수용함에는 속도감을 요구하게 되었다. '더 쉽게 더 빨리' 라는 요구에 부합하는 것이 이미지의 활용이다.
특히 통신매체가 발달하고 정보사회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모든 사물을 이미지로 환원하여 통신의 대상으로 삼고, 이미지 자체를 통신의 수단으로 삼게 되었다. 어느 한 기업의 로고는 그 기업을 상징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특정한 상품에 대한 신뢰도의 이미지로 작용한다. 마찬가지로 사랑, 행복, 가슴 떨림, 죽음, 고독 등의 사물들도 이미지를 통해 전달하고 이미지로서 의미를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이미지 수단의 범람에 큰 몫을 하는 것이 CF들이다. 영화관이나 TV에서 보는 CF는 이미지를 미화하고 모든 전언을 이미지로 바꾸는 데에 탁월한 기법과 흡인력을 개발해내었다. 이런 영상들은 너무나 우리에게 익숙하고 심지어는 하루하루가 이런 영상 이미지로 채워진다고 여길 정도이다.
이미지 수단에 의한 상품화, 통신화, 정보화 사회는 자연스럽게 시각적 문화를 모든 문화의 중심으로 끌어오게 된다. 그러나 그 시각적 문화가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이어서는 상품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시각문화의 흐름은 그 자체가 정보통신사회의 산물이고 그런 만큼 소통되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며, 또 시각문화로의 추이는 소비적 욕망에서 출발한 시장문화이기 때문에 어렵고 까다로워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최근의 이미지화로 이루어지는 시각 중심 문화들은 다분히 통속적이고 풍속적이며 생활적이다.
한편 정보통신화에 따른 개인의 소외감과 격리감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개인의 사정을 위로해 줄 수 있으면서 개인과 사회를 연결짓는 것이어야 한다. 서사를 담고 있되 서사 본래의 골치 아픈 관념성을 떨쳐 버리고 쉽고 편안하며 빨리 내 것으로 소화할 수 있는 이야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언어적 상상력을 매개로 하여 수용할 대상이 아니라 시각적 방법으로 쉽게 수용할 그런 대상이어야 한다. 이런 욕구에 가장 합당한 장르가 영화이다.
영화는 종합예술이지만 근본적으로 이미지를 결합하여 이야기를 전달하는 시각적 문화체이다. 따라서 소설이 주류를 이루던 문화권역에서 급격하게 영화가 지배력을 넓혀가고 있다. 물론 그 지배력은 대중문화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예술적 영역에서도 영화가 급격하게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바로 이미지를 중심 매체로 삼는 변화 과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점점 이미지는 수단에서 목적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어떤 메시지와 생각이나 정서를 전달하고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되었던 이미지가 이제는 표현의 목적 자체로 대두하는 것이다. 이제 독자 혹은 관객들은 무슨 이미지가 있는가를 보려고 소설에 접근한다.
영화, 혹은 영상매체가 서사양식의 지배력을 높여감에 대하여 특별히 가치부여를 할 필요는 없다. 영상문화가 비중을 확대하여 간다고 해서, 그 사실 자체 때문에 우려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이 보편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자본의 횡포라든가, 자본의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내는 허상에 의한 것이라면 우리는 경계를 늦출 수가 없다. 이는 문화 현상이 우리의 삶을 억압하고 이용하며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의 이미지화가 급격하게 유행하는 지금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영상화의 진행 자체가 아니라, 영상화의 성격이다.
현실에 대한 비판력을 상실하고, 이미지에 사로잡혀 주체를 상실해버리는 현상은 매우 두렵기도 하다. 이미지가 수단에 머물지 않고 목적으로 부상해버리면 영상적 기능의 특성상 우리의 문화적 기능은 크게 상업의 논리에 종속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그나마 성찰과 비판의 기능을 맡아야 할 언어예술인 문학마저 이미지를 목적으로 삼아버리면 그 위험성은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3. 상상력과 가상 현실
우리는 소설을 왜 읽는가? 영화는 왜 보는가? 소설과 영화에는 현실과 다른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 소설과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내가 속하지 않은 또 하나의 세계를 엿본다. 남의 삶을 엿보는 것 자체가 하나의 흥분이며 쾌락이다. 엿보고 엿듣는 일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거의 본능적인 것인데, 현실에서 그런 일은 비윤리적이며 반교양적인 행위이며 심지어 범죄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설이나 영화는 실제 세계가 아니라 만들어낸 세계를 우리 앞에 던져주고 엿보는 쾌감을 즐기라고 한다. 이 엿봄은 그 대상이 실제 현실이 아니라, 관습적 장치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이므로 떳떳한 문화 행위가 된다. 그러나 엿보고 엿들음에서 오는 얄궂은 쾌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여전하다.
우리는 왜 엿보기를 즐겨할까? 그것은 타자의 영역에 침범하는 데에서 오는 약탈 본능의 산물은 아닐까? 혹은 은밀한 타자의 생활을 나의 생활과 비교하면서 나의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즐거움은 아닐까? 또는 타자의 비밀스러움을 들여다봄으로써 느끼는 도둑놈 심보에서 오는 즐거움은 아닐까? 어느 것이 정답인지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엿보는 세계에 나는 속해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나의 세계와 저 쪽 세계를 단절시켜 보는 것이며, 그런 분리작업을 통하여 나의 비밀스러움을 유지한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내가 속하지 않은 타자의 세계를 엿볼 때, 그 세계는 원천적으로 나와 분리됨으로써 하나의 비현실이 된다. 나로서는 나를 남의 세계에 투영시켜보는 가상 현실을 눈앞에 두게 되는 셈이다. 소설이든 영화든 잘 만들어진 작품에서는 그 가상 세계가 어떤 통로를 통해서든 실제 현실, 즉 나의 삶과 연결된다. 독자 혹은 관객에게 자신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그 작품이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다만 소설은 그 과정이 직접적 시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상상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반면 영화는 영상이라는 매체를 활용하여 직접적 시각을 통해서 접하도록 한다. 이 점에서 소설이 영화보다 감각적 전달력이 약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므로 오히려 더 다양하고 깊이 있는 삶의 탐구가 가능하기도 하다. 직접성과 감각성이 철학적 사고의 깊이를 차단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최근에 몰래카메라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다고 한다. 소형렌즈 개발 등의 기술적 발전이 가져온 결과이기도 하지만, 엿보기를 더 노골적으로, 병적으로 즐기는 현대인의 자기 망각증세에 기인한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자기 세계는 더 이상 찾아볼 것이 없고 남의 은밀함을 보면서 자기 위안과 약탈적 도둑행위의 즐거움을 동시에 즐기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몰래카메라 폭주 현상은 가상 현실과 실제 현실을 뒤섞고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하는 탓에서 오는 것으로 문화적 인식능력의 부족이 사회적으로 심각함을 의미한다.
또 한편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더 심각한 문제가 놓여있는데, 개인의 감수성과 현실인지능력을 마비시키는 거대자본의 장난이 그것이다. 거대자본은 이제 상품 생산과 유통으로만 이윤 창출의 기제를 장악할 수 없다고 보고 문화산업이나 미디어산업에 일찍이 눈을 돌려왔다. 소프트웨어시장, 특히 컴퓨터의 게임 시장은 가상현실을 더 실감나게 만들어내고, 인터넷에서는 몰래카메라로 잡은 남의 비밀스러운 현장을 보여주기에 급급하며, 공중파 TV방송에서도 몰래카메라를 이용한 장난치기로 개인의 삶을 뭉개고 있다. 어쩌면 이제 우리는 급격하게 가상 현실과 실제 현실의 괴리감에 대한 감각이 둔해지고, 가상 현실을 실제 현실로 대체하려는 지각적 마비현상에 사로잡힐 지도 모른다. 실제로 최근의 소설과 영화들은 그러한 우려를 강하게 갖게 하면서 소설예술, 영화예술이 가져야 할 사고력을 제거하고 있다.
영화 한 편을 예로 들어보자. 최근에 상영한 <트루만 쇼>는 바로 훔쳐보기라는 현대인의 병적 현상을 풍자하는 작품이다. 그러면서 이 영화 자체가 동시에 그러한 자본의 문화 상품이기도 하다. <트루만 쇼>는 바로 엿보기를 즐기는 현대인의 기호에 착안을 한 거대자본 미디어가 개인의 삶을 현실에서 어떻게 삭제해 가는가를 보여준다. 이 영화의 착안점은 바로 우리가 즐기는 TV 드라마가 결국은 엿보기에서 오는 것임에 두고, 몰래카메라를 거대하게 동원해 한 개인의 삶을 드라마처럼 엿보게 한다는 스토리를 만들어내었다.
이 영화작품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거대자본은 하나의 섬에 인공도시를 만든다. 도심지와 빌딩과 자동차와 건설 중인 다리,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 바다와 해변까지 실제 도시와 자연이 그대로 세트화되어 만들어져 있다. 모든 것이 만들어진 것이고 모든 사람은 배우들이다. 그 인공도시는 인공위성을 통한 카메라장치로 둘러싸여 있다. 어디나 몰래카메라는 장착되어 있는 것이다. 이 섬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배우가 아닌, 실제 삶을 사는 사람은 주인공 트루만(배우 짐 캐리가 이 역을 맡았다.) 뿐이다. 트루만(Truman)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런 상징성을 지닌다. 모든 사건, 모든 관계, 심지어 부부관계마저 각본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트루만 자신뿐이다. 하늘의 태양마저도 감독의 큐 사인에 의해 하늘에 떠오른다. 'Cue the Sun'이라고 감독이 외칠 때 깜깜한 밤이 갑자기 환한 대낮이 된다. 이 짧은 대사는 미국 영화계에서 상당한 유행어가 된 듯하다.
트루만 쇼는 전 세계에 방송된다. 이 거대자본이 투자된 드라마는 트루만이 태어날 때부터 영화의 현재 시간까지 하루 24시간 끊임없이 보여졌으며, 트루만은 자신도 모르게 세계적인 스타가 되어 있다. 각본은 교묘하게 짜여지고 트루만이 태어나서 자라고 일하는 이 인공도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심리전술마저 활용되어, 아버지가 바다에 빠져죽는 장면을 어린 트루만이 목격하도록 각색함으로써, 실제로 트루만으로 하여금 물에 대한 공포심으로 배를 타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배를 탄다는 것은 이 인공도시 셋트를 빠져나감을 의미하고 그러면 이 거대한 드라마는 파국을 맞고 만다. 이처럼 철저히 만들어진 삶, 통제된 생활, 짜여진 인간 관계를 전 세계의 TV시청자가 엿보는 것이다. 거대자본은 이렇게 어마어마한 투자를 하지만, 트루만이 먹는 코코아에서부터 그가 사용하는 모든 용품들이 광고대상 상품이고 계약에 의해 이 상품들을 전 세계에 광고함으로써 충분히 이윤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발상 자체는 실제 우리의 현대생활이 개인화되어 비밀스러우면서도, 몰래카메라에 노출되어 있고, 자본 중심의 사회 구조에 의해 자기도 모르게 통제되며, 가식과 허위로 가득 채워져 있음을 환기시킨다. 그런 점에서 그 발상이 예사롭지 않은 영화 작품이다. 오히려 만들어진 이 인공도시의 세계가 더 자연스러우며 진실 되고, 밖의 세계가 질병과 허위에 가득 차 있다는 영화 내 ‘트루만 쇼’의 제작감독자 크리스토프의 생각은 바로 우리 현대 사회의 병적 구조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발상이 흥미롭다 하더라도 실제 지금 이러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고(자본의 다국적화가 완성되면 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인간 사회의 양심이 이토록 자본의 노예가 될 일도 없을 것이므로, 영화 자체는 가상 현실을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그런데 영화 자체도 가상 현실이다. 따라서 이 영화 작품은 그 자체가 가상 현실을 다룬 가상 현실이다. 이러한 발상의 흥미로움에 비하여 내부 스토리는 빈약한 편이어서 관객으로 하여금 긴장감을 느끼게 할 집중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한 여인에 대한 트루만의 집착도 개연성이 부족하고, 자신이 조정되고 있다는 깨달음이나 그 현실에서 탈피하려는 트루만의 내면적 고투도 보이지 않는다. 그 결과 이 영화가 설정한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력도 의도하는 바대로 살아나지 못하고 말았다.
가상 현실의 허구성을 통하여 영화가 보여주어야 할 문제들, 통제당하는 개인의 비밀스러움이 지니는 보편적 의미나, 엿보는 사람들의 반응의 다양하고 심각한 양상들, 인공사회가 지니는 환경적 문제나 현실에 대한 환기력 등을 이 영화는 보여주지 못하고 말았다. 이 점은 이 영화의 주제 의식이 빈약함을 의미하는데, 이따금 나오는 감독 역을 맡은 인물의 현실 비판적 대사가 너무 상투적이고, 영화의 결말 또한 단순함도 이를 입증한다.
작품 안에 설정된 트루만의 가상 현실에는 탈출구가 있었다. 트루만은 너무 쉽게 그 탈출구로 빠져 나온다. 우리의 통제 사회,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이 사회에서는 탈출구를 쉽게 찾을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비극 아니겠는가? 결국 자기 존재의 근원과 주체성을 확인하고 찾을 때 그 탈출구의 발견도 가능할 것이라면, 트루만은 더 깊게 자기 고뇌와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아쉬움이 큰 작품이다.
이 작품 <트루만 쇼>가 노출한 위와 같은 한계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가 지닌 결점에도 요인이 있을 수 있고, 배우들의 연기나, 촬영에 관계되는 여러 기술적인 문제들, 혹은 감독의 연출력 등에서도 요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영화 장르 자체가 지닌 한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의 모든 메시지는 이미지에 실려 전달되는데, 순간적인 장면 변화 속에서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투사하는 이미지에 개인과 사회의 복잡한 갈등 양상을 싣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결국 카메라가 아무리 뛰어난 영상미를 담아내고, 감독이나 시나리오작가가 깊은 통찰력을 지닌다 하더라도 이미지의 한계 자체를 극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트루만이 가상 현실로부터 쉽게 탈출구를 찾을 수 있어야 하는 설정은, 영상적 방법상 트루만의 현실 윤곽을 보여주지 않으면 관객이 전반적 상황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가야 한다. 소설에서는 언어의 추상적 속성으로 말미암아 트루만의 현실적 고뇌를 더 다각적으로 그려내는 상상력을 담을 수 있는 반면에,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이미지 매체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가상 현실 매체인 영화에서는 주체의 자기 탐구가 진정한 근원에 이를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에 가상 현실이라는 상황을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데에는 영화 장르가 훨씬 용이함을 <트루만 쇼>는 잘 입증한다. 현실과 허구를 분리하여 보려는 관점에 빠져있는 신세대들과 그들을 옹호하는 신세대 작가들은 그런 이유로 소설의 고유한 틀을 해체시키면서 까지도 이미지와 가상 현실을 표현의 목적으로 삼으려 함으로써 소설 문학을 위기에 몰고 있다.
4. 가상 현실과 허구적 서사
가상 현실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세계에 대한 발견은 소설 장르의 입지들을 점점 어렵게 만들지 모른다. 가상 현실은 컴퓨터가 발전하면서 인류가 만들어낸 말 그대로 가상적 시․공간인데, 원래는 어떤 논리 전개의 필요상 가설적으로 상정한 단계를 가리킨다. 따라서 가상 현실은 논리적 산물이다. 그리고 당연히 인식의 과정에서만 필요한 것일 뿐, 어떤 필요성이 충족되면 바로 사라지는 그러한 세계이다. 그런데 시각적 문화와 가상 현실이 결합하면서 가상 현실을 하나의 상상 세계로 격상시키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 자체를 문화적 작업으로 간주하려는 것이다.
최근 젊은이들이 가상 현실에 심취하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주위에서 볼 수 있다. 가장 흔한 것이 컴퓨터게임과 애니메이션이다. 그런데 이런 가상 현실을 즐기고 가상 현실을 현실의 모델이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 중에는 지나치게 그 세계에 심취하여 가상 현실을 현실 반영의 하나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소설의 허구와 가상 현실을 혼동하는 현상마저 생겨나게 되었다. 이 또한 이미지를 목적으로 삼는 착각 현상과 하나로 통한다.
가상 현실과 소설의 허구는 당연히 다르다. 그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가상 현실은 논리적으로 혹은 공상적으로 만들어 낸 세계이므로, 거기에는 현실의 다양하고 총체적인 구조적 관계가 들어갈 수 없다. 반면 소설의 허구는 논리로 만든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담기 위한 미적 성찰로 구조화한 것이다. 즉 가상 현실에는 어떤 진실도 들어있지 않은 반면에 소설의 허구에는 진실을 규명하고 소통하려는 의도와 그 형성 과정이 담겨있다. 영화의 경우, 이 문제가 좀 복잡해서 단순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 가상 현실을 영화의 세계로 내세우는 경우도 있고 삶의 과정을 재현하는 허구적 현실을 담을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보다는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가상 현실에 접근하고자 하는 문화 감각에 더 의존하는 장르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최근의 신세대 작가들은 급격하게 이미지 추구, 가상 현실적 방법, 이야기의 영화화에 쏠리고 있다. 이제 이 문제를 소설의 장르 성격 변화와 관련하여 좀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하여, 현대문학사에서 발간한 1998년도 <올해의 좋은 소설>에 실린 작품들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특별히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을 선택한 이유는 없지만, 여러 현장 비평가들이 올해의 좋은 소설로 추천한 작품들이니만큼 객관성에 비추어 최근 경향을 대표할 자격이 있는 작품들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작품들을 대상으로 삼는다.
윤대녕은 신세대 작가의 좌장격인데, 이 작품집에는 <3월의 전설>이란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이 작품은 하동, 구례 지역을 원거리 배경으로 삼고 서울의 거리를 근거리 배경으로 삼으면서 두 배경을 병합시키고 있다. 여기에는 현실과 현실의 뿌리라 할 시원(始原)의 세계를 중첩시키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물론 이렇게 시원의 세계를 찾는 여정은 윤대녕 소설 세계의 현저한 특징이고, 그 여정의 형상화를 위하여 이 작품에서도 여지없이 은어, 벚꽃, 매화 등의 자연물을 소재로 활용한다.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목각, 레코드판 등의 사물들도 인연에 의해 만나고 헤어지는 존재 원리를 해명하려는 이야기의 소재로 쓰인다. 여기에 네 명의 여인을 등장시켜, 그 네 명이 하나이기도 하고 여럿이기도 한 모호한 설정으로 우리 내면의 모호함을 끌어들인다. 그를 통하여 근원의 아릿한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고 현실 또한 모호하기만 해진다. 윤대녕의 이 작품은 결국 현실을 커튼으로 가린 채, 추상적 이미지로만 기능 하는 인물들을 내세워 연기 속에 아른거리는 저 멀리에 무엇인가 있다고만 알려준다. 작품의 세계가 아른거리기만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보기 위하여 현실의 어디에서 출발하여야 하는지 혹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도 듣지 못한다. 실제로 우리 삶이란 놈 자체가 아른거리기만 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작가는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느냐는 반론도 있을 법하다. 이런 항변을 신세대 작가들에게서 우리는 자주 들을 수 있다.
아른거리는 것을 아른거린다고 말하기는 쉽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 더 멋지게 할 수 있음을 자랑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 핵심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으면, 적어도 보려고 하는 의지라도 없으면 시원을 언급할 자격이 없다. 결국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 삶의 한 풍속도를 집약하고 축조한 이미지 한 쪽이다.
다른 작가의 작품들은 윤대녕보다 더 이미지적이고 가상 현실적이며 훨씬 영화적이다.
김영하의 <흡혈귀>는 뱀파이어, 호러, 공포물 영화를 닮았다. 두말 할 것 없이 이 작품은 드라큐라식 영화 문법에 기대고 있다. 한 개인의 소외 현상과 반사회적 아웃사이더로 변해 가는 현상을 통하여 우리 삶의 억눌림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이 작품의 주된 목소리로 보인다. 그러나 인물의 엽기적 기행이 작품 안에서 해명될 가능성은 없다. 현상만이 문제가 될 뿐이다. 이 작품은 드라큐라식 영화를 현실 해부에 이용하려고 시도했는지 모르나 결국은 드라큐라식 인식을 보여주기 위해 현실을 빌려온 꼴이 되었다.
원재길의 <먼지의 집>은 이 작품과는 그 성격이 다르지만 기법 면에서는 컬트무비적이어서 흡사함을 보여준다. 침대에 누워있던 여인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먼지로 화해 가는 모습은 영화의 한 씬을 연상하게 한다.
하성란의 <양파>는 우연을 계기로 하여 전개하는 우리 삶의 굴곡을 담아낸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는 서술자의 기능이 거의 제거되고 있다. 모든 것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을 카메라로 보여주듯이 보여진다. 물론 거기에는 순서가 있기 때문에 서술자의 기능이 완전히 제거될 수 없고 다만 숨기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표현 양상 역시 영화적이다. 이 소설에서는 회칼, 유모차, 찌그러진 자동차 등의 이미지가 소설 전면에서 이야기를 감싸고 있다. 삶을 이야기하려는 소통의 의지는 찾아볼 수 없고 독자는 작가의 눈이 무엇을 보는가를 볼뿐이다. 하성란을 비롯하여 많은 여성작가들의 이미지 추구는 마치 홍콩의 왕가위 영화를 보는 듯하다. 이런 이미지 추구 작업이 미적 감수성을 촉진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을 모두 이미지로 치환함으로써 현실을 몽롱하게 문질러 버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에서 우려감을 갖게 한다.
백민석도 신세대 작가 중 특이한 기풍으로 자기의 세계를 나름대로 축조하고 있는 작가이다. 그런데 그는 기본적으로 폭력의 미학(?)을 지향하고 있다. 이는 폭력 자체를 미화하는 과정을 담고 있음을 뜻한다. 물론 어느 작가가 폭력을 지향하겠는가? 그가 폭력적 세계를 지향한다는 말은 폭력 자체를 즐기게 하거나 자신이 즐긴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작품의 세계를 폭력으로 설정하고 그 속에서 인간 관계를 폭력에 기반 하여 보려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백민석이 그 세계를 다루는 방식은 느와르 영화 식이다. <목화밭>은 한 대학강사와 그 부인을 중심에 두고 그 부부가 폭력으로 삶의 의미를 형성함을 이야기한다. 여기에는 어떤 근원적 이유가 설정되어 있지 않다. 그런 이야기로 현실을 어느 정도 비판적으로 부각시킬 수가 있겠지만, 인간이 근본적으로 폭력을 사랑한다는 케케묵은 발견 외에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처럼 최근의 소설들은 영화적 논리, 영화적 기법, 영화적 문맥에 빠져있다. 그로써 얻는 것은 현실 감각의 미적 탐구, 이미지의 새로운 개발, 우리 개인의 내면적 다양화와 그 황폐한 그림자 보기 등이겠지만, 잃는 것은 소설 자체의 힘이다. 이 작가들이 설정하는 주인공의 환경이란 거의 다 가상 현실이다. <먼지의 집>의 먼지투성이 집, 형과 말없는 여인 등도 가상 현실적이고, 김영하의 <흡혈귀>가 설정한 부부의 삶도 가상 현실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목화밭>에서 그려지는 삼촌과 그의 사무실, 삼촌과 주인공과의 관계, 부부 폭력 등도 가상 현실적이다. 배수아, 하성란, 전경린 등이 그려내는 비일상적 일상화도 역시 현실의 문맥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를 비유나 상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려면 현실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이 기본적으로 깔려있어야 한다. 둘 사이를 연결하는 어떤 논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소설들은 현실을 왜곡되게 조작한 이미지들일 뿐이다. 거기에는 구체적 삶의 과정과 연결할 어떤 고리도 없기 때문이다.
5. 새로운 소설의 자기 세계 찾기
지금까지 신세대 작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영화화되어 가는 소설 작품 경향을 꼽아서 소설 장르의 변화라는 취지에서 살펴보았다. 어느 비평가는 약간의 언어 유희를 빌어서 오늘의 신세대는 辛세대이며, scine세대이고 seen세대라 하였다. 보는 세대이며 동시에 보이는 세대라는 것이다. 현실을 영화의 장면으로 대체하거나 영상적으로 조각내고 편집하여 보여 주려는 것이 그들의 방법이다.
문제는 장면화하고 이미지화하면서 가상 현실로 현실 대면을 뒤덮는 그 자체가 아니라, 이런 방법을 최선으로 여기거나 첨단적 기법으로 보는 착각들이다. 물론 이러한 소설들이 일정한 진보적 열정을 담고 있고 치열한 실험 정신을 겸비하고 있으며, 새로운 사회를 열고자 하는 열망을 지니고 있음은 사실이다. 지금은 그 문이 보이지 않으므로 여기저기를 쳐대며 그 통로를 찾으려고 하는 노력에서 이런 경향을 추구함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 듯하면서도 개인의 입장에서는 너무 단순해 보이는 현실 자체의 성격에서 나온 것임도 사실이다. 즉 정보통신 사회가 필연적으로 봉착하는 개인적 삶의 무의미화, 관계의 단절 심화 등에 대한 저항적 반응이다.
그러나 사회가 더 복잡해지고 다양해질수록 우리는 총체적 본질을 찾으려는 시각을 유지해야 한다. 물론 그 방법은 다양해지는 것이 좋고 그 다양한 방법들에 대한 이해와 탐구가 계속되어야 한다. 근본적으로 삶의 중심은 현상이 아니라 인간이며 인간을 바로 보는 것이 모든 방법의 근원에 놓여져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는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는 현실 속의 틀을 찾아야 하고, 여러 관계 즉 개인과 개인의 관계, 인간과 자연, 사물의 관계, 개인과 사회의 관계 등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눈을 가져야 한다.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서사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서사성을 회복해야 관계가 살아나고 관계가 살아나야 주체의 다양한 삶의 방법과 태도도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새로운 세기의 소설은 머지 않아 인간의 총체적 복원을 추구하려고 할 것이다. 인간이 지혜로와 진다면 잘 사는 것을 새롭게 추구할 것이고, 새로운 삶의 방법과 정신을 계몽하기 위한 서사가 필요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서사성이 되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그 서사성은 이전의 이야기 방식과는 달라져야 한다. 지금 이미지화와 영화화 기법은 그 자체만으로는 의미를 지닐 수 없으나, 근본적인 서사성을 갖춘 마당에서는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를 잘 가꾸면서 서사의 근본적 힘을 상실하지 않도록 지키는 노력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10년 넘은 자료 스크랩이라 출처를 잊음 문제시 삭제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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