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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고전문학

채수, <설공찬전> 스크랩 정리

by 솜비 2020. 8. 20.

● 채수, <설공찬전>에 관한 자료 스크랩 & 중요한 부분 체크
설공찬전 : 1511년(중종 6) 무렵 '채수'가 지은 고전소설.  
『중종실록』에서는 ‘설공찬전(薛公瓚傳)’,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에서는 ‘설공찬환혼전(薛公瓚還魂傳)’으로 표기하였고, 국문본에서는 ‘설공찬이’로 표기하고 있다.
한문 원본은 1511년 9월에 그 내용이 불교의 윤회화복설을 담고 있어 백성을 미혹한다 하여 왕명으로 모조리 불태워진 이래 전하지 않는다. 그 국문필사본이 이문건(李文楗)의 『묵재일기(默齋日記)』 제3책의 이면에 「왕시전」·「왕시봉전」·「비군전」·「주생전」 국문본 등 다른 고전소설과 함께 은밀히 적혀 있다가 1997년 극적으로 발견되었다. 국문본도 후반부가 낙질된 채 13쪽까지만 남아 있다.
 
  
● 줄거리
- 사촌 몸에 들어간 설공찬 → 사촌들과 화해하는 설공찬(저승이야기를 시작하는 계기) → 저승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설공찬.
 
순창에 살던 설충란에게는 남매가 있었는데, 딸은 혼인하자마자 바로 죽고, 아들 공찬도 장가들기 전에 병들어 죽는다. 설공찬 누나의 혼령은 설충란의 동생인 설충수의 아들 공침에게 들어가 병들게 만든다. 설충수가 혼령을 쫓기 위해 주술사 김석산을 부르자, 혼령은 공찬이를 데려오겠다며 물러간다. 곧, 설공찬의 혼령이 사촌동생 공침에게 들어가 왕래하기 시작한다.

설충수가 다시 김석산을 부르자 공찬은 공침을 극도로 괴롭게 하는데, 설충수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빌자 공침의 모습을 회복시켜 준다. 공찬은 사촌동생 설워와 윤자신을 불러오게 하는데, 이들이 저승 소식을 묻자 다음과 같이 전해 준다.
저승의 위치는 바닷가이고 이름은 단월국, 임금의 이름은 비사문천왕이다. 저승에서는 심판할 때 책을 살펴 하는데, 공찬은 저승에 먼저 와 있던 증조부 설위의 덕으로 풀려났다. 이승에서 선하게 산 사람은 저승에서도 잘 지내나, 악한 사람은 고생을 하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 이승에서 왕이었더라도 반역해서 집권하였으면 지옥에 떨어지며, 간언하다 죽은 충신은 저승에서 높은 벼슬을 하고, 여성도 글만 할 줄 알면 관직을 맡을 수 있다.
하루는 성화황제가 사람을 시켜 자기가 총애하는 신하의 저승행을 1년만 연기해 달라고 염라왕에게 요청하는데, 염라왕은 고유 권한의 침해라고 화를 내며 허락하지 않는다. 당황한 성화황제가 친히 염라국을 방문하자, 염라왕은 그 신하를 잡아오게 해 손을 삶으라고 한다.
  
 
● 의의와 평가
이 작품은 귀신 또는 저승을 주요 소재로 활용하고 있다. 채수는 어렸을 때 귀신이 출현하는 현장을 목격한 경험이 있는데, 이것이 작품 창작에 강력한 동인으로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남염부주지」·「박생」이야기 같은 여타 저승경험담 계열의 전기(傳奇)소설이나 설화에서와는 달리, 주인공이 살아나지도, 그 일을 꿈속의 일로 돌리지도 않는다. 다만, 주인공의 영혼이 잠시 지상에 나와 자신의 경험을 진술한다는 점에서 매우 개성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순창이라는 실제 지역을 배경공간으로 삼아 이 곳을 관향으로 하는 설씨 집안의 실화라 표방하고, 등장인물도 실존 인물과 허구적 인물을 교묘히 배합해 설정하였다('사실과 허구의 결합'이라는 소설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친숙한 원귀관념 및 무속에서의 공수현상 등을 활용함으로써 대중의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과 채수의 행적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이 어떠한 주제를 지향하고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강직한 언관의 길을 걷던 채수는 중종반정 직후 관직을 버리고 처가인 함창(지금의 상주)에 은거하였는데, 여기에서 쾌재정을 짓고 소일하는 동안(1508년에서 1511년 사이) 평소 발언하고 싶었던 바를, 이 소설을 빌어 피력한 것으로 보인다.
작품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주인공 공찬의 혼령이 전하는 저승 소식인데,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반역으로 정권을 잡은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 대목이다. 이는 연산군을 축출하고 집권한 중종정권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폭군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보필하여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하는 것이 신하의 바른 도리라는 평소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다.
아울러 여성이라도 글만 할 줄 알면 얼마든지 관직을 받아 잘 지내더라는 대목도 주목되는데, 이는 여성을 차별하는 조선의 사회체제를 꼬집은 것이라 하겠다.
한마디로 말해, 이 작품은 유교이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혼과 사후세계의 문제를 끌어와 당대의 정치와 사회 및 유교이념의 한계를 비판하였다고 할 수 있다.
  
* 채수는 세조 14년(1468)에 생원시에 합격한 후 사헌부, 홍문관 등을 역임하면서 주로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 참여하였는데, 성종 때에 폐비 윤씨에 대한 애석함을 표현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벼슬에서 물러나게 된다. 하지만 1485년에 충청도 관찰사로 관직에 다시 돌아와 성균관 대사성, 호조참판 등에 이르게 되나, 연산군이 등극한 후에는 외작에 머무르며 무오사화를 피한다. 그 후 중종반정(1506)에 가담하고 그 공으로 인천군에 봉해진다. 
하지만 이일은 채수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중종 반정을 주도한 인물이 채수에게 동참을 청했으나 그는 제안에 응하지 않았다. 반정 당일에 채수의 사위가 장인인 채수에게 술을 먹여 만취한 상태인 채수를 부축하여 거사 장소인 대궐 앞으로 데리고 가 거사에 참여하게 만든 것이었다. 후에 이 일을 알게 된 채수가 '어찌 이게 감히 할 짓이냐'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거사에 가담한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처가인 함창(지금의 상주)에 은거하며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은거지에서 쓴 작품이 서울까지 전해져 널리 읽혀진 것으로 보아 매우 인기있는 소설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당대에 소설이 상당히 대중화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 때문에 사헌부에서 수거해 소각하고 처벌을 요구하는 등 4개월 동안이나 논란을 벌였고, 채수는 이일로 인해 파직 당한다.
 
 
★ 국문학사적 가치
이 작품이 지니는 국문학사적 가치는 지대하다. 이 작품은 금오신화」를 이어 두 번째로 나온 소설로서, 「금오신화」(1465∼1470)와 『기재기이(企齋記異)』(1553) 사이의 공백을 메꾸어 주는 작품이다. 특히, 그 국문본은 한글로 표기된 최초의 소설(최초의 국문번역소설)로서, 이후 본격적인 국문소설(창작국문소설)이 출현하게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1609~1622)보다 100여년이나 앞선 작품)
그 동안 학계에서는 최초의 국문소설로 알려진 「홍길동전」이 장편인 데다 완벽한 구조를 지니고 있어, 필시 그 이전에 어떤 형태로든 국문표기 소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왔다. 그러나 그 중간 작품으로 제시된 「안락국태자전」·「왕랑반혼전」 등이 모두 소설이 아닌 불경의 번역이라 안타까워했는데, 「설공찬전」의 국문본이 발견됨으로써 이 가설이 물증으로 증명되었다.
이 작품은 조선 최초의 금서로 규정되어 탄압받았을 만큼, 각지 각층의 독자에게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인기를 끌어 조정에서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 소설로는 유일하게 『조선왕조실록』에도 올랐으니, 소설의 대중화를 이룬 첫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국문으로 번역되어 유통된 것은 이러한 인기와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이며, 이 작품의 국문본은 우리 소설 연구에서 번역체 국문소설(광의의 국문소설)의 가치를 적극 평가할 필요성을 강하게 일깨워 준다.
 
 
 
참고 : 청소년을 위한 한국고전문학사  [네이버 지식백과] 설공찬전[薛公瓚傳]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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