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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현대문학

이용악 '낡은 집' 해석/해설

by 솜비 2019. 11. 18.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래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모도 모른다.

찻길이 뇌이기 전
노루 멧돼지 족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도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가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보냈다는
그 날 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 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한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고양이 울어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한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 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디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국만 눈 우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 이용악 ' 낡은집'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서사적, 향토적

- 주제 : 일제 강점기 유랑민의 비극적인 삶

- 특징 1. 액자식 구성과 과거 회상 형식을 통해 시상을 전개

        2. 가족사적 일대기 형식을 통해 일제 강점기 농촌의 전형적인 삶을 표현


작가 소개
이용악(李庸岳 1914-1971) 시인. 함북 경성군(鏡城郡) 출생. 일본 도쿄[東京] 조치[上智]대학 신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재학 중 <신인문학(新人文學)>에 시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 문단에 등단했다. 김종한(金鍾漢)과 함께 동인지 <이인(二人)>을 발간했고, <인문평론(人文評論)>지의 기자로 근무하기도 했다. 초기의 시 가운데 “북국의 가을”, “오랑캐꽃” 등은 대체로 모더니즘적 취향을 드러내고 있으며, 뛰어난 감각적 이미지의 구사에도 불구하고 그 예술적 형상이 단편적이라는 지적도 받았다. 그의 시의 탁월함은 모더니즘에의 유혹이 축소, 완화되고 대신 구체적인 자기 삶에 굳건히 바탕을 둔 ‘이야기 시’를 지향할 때 비로소 발현된다. “눈 나리는 거리에서”, “슬픈 사람들끼리” 등의 ‘이야기 시’가 가진 매력은 당시 조선 민중의 삶을 압박하는 정치․경제적 고통을 구체적인 경험에 긴밀히 관련시켜 하나의 분명한 예술적 형상, 또는 문학적 전형을 창출해 보이는 데서 찾아진다. 8․15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맹원으로 활약하다가 군정 당국에 의해 수감되었고, 6․25 전쟁 중에 월북했다. 그 밖의 작품에는 시에 “버드나무”, “두메산골”, “구슬”, 시집에 <분수령(分水嶺)>, <낡은 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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